일본의 링 위에서 쓰러진 비운의 복서…이동춘을 아시나요?

일본 J리그에서도 활약했던 유상철 인천 유나이티드 전 감독이 세상을 떠난 지난 6월 7일. 그의 부고는 곧바로 일본에 전해졌고 많은 일본 팬들도 유 감독과의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스포츠 전문 미디어에서는 그가 췌장암 말기로 투병해 왔다는 사실과 예전 소속했던 요코하마 마리노스의 서포터스가 한국 경기 당시 “할 수 있다 유상철 형”이라고 적힌 현수막을 내건 일, 그리고 이를 본 유 감독이 직접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일본을 찾았던 일 등을 잇따라 보도했다.

이는 유상철 감독을 선수로서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사랑하고, 일본 축구 팬들과의 강한 인연을 느끼게 해 주는 기사들이다.

지금까지 일본에서는 축구 외에도 많은 한국인 선수들이 활약해 왔다. 지금도 재일코리안과 한국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뿌리 깊게 남아있는 일본이지만, 스포츠 세계에서는 때로는 그런 문제를 뛰어넘은 깊은 관계가 탄생하기도 한다.

선수로서 실력을 인정받고, 인간적인 교류가 깊어지면서 비로서 국적과 민족의 차이를 넘어 서로를 인정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개인과의 관계에 한정되어 사회 전체로 확산되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지만 말이다.

유 감독의 부고와 그가 여전히 일본 팬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필자의 머리 속에는 한 명의 복싱 선수가 떠올랐다.

일본에서 복싱 선수 활동을 한 이동춘(그레이트 가네야마)

그의 이름은 이동춘. 일본에선 ‘그레이트 가네야마(グレート金山)’라는 닉네임으로 활약하며 많은 사랑을 받은 선수가 있었다.

1963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동춘은 당시 국민학교 2학년 때 어머니를 여의고, 가난 속에서 12살부터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이동춘은 17살 때 복싱 선수로 프로에 데뷔했고, 19번째 경기에서 한국 챔피언에 올랐다.

1985년에 세계 타이틀에 도전한 그는 당시 챔피언을 거센 기세로 몰아 붙였지만 결국 패하고 말았다.

두 번째 세계 제패 도전에도 실패한 이동춘에게 세 번째 챔피언 도전 기회를 따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 한국 복싱계는 다섯 명이나 되는 세계 챔피언을 지닌 황금기로 경쟁이 매우 치열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세계 챔피언의 꿈을 향해 일본으로 건너왔지만…

그럼에도 세계 챔피언이라는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동춘은 활동 터전을 일본으로 옮겨 재기를 노렸다. 집과 식사 그리고 당시 월 20만엔의 월급을 보장한다는 좋은 조건으로 일본에 건너 왔지만, 그 약속은 금방 깨지고 말았다.

가난과 허리 부상으로 괴로워하면서도 재일코리안 실업가들과 일본인 여자친구의 지원을 받으면서 이동춘은 일본에 온지 4년 째에 일본 팬텀급 챔피언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이 타이틀을 7번이나 방어하면서 세계 랭킹 5위까지 껑충 뛰어올랐다.

하지만 타국 땅에서 외국인 복서인 이동춘에게는 세계를 향한 도전의 기회는 돌아오지 않았다. 일본의 매스컴과 스폰서가 원하는 ‘상품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1995년 2월 이동춘은 가와마스 세츠오(川益設男)와의 8번 째 방위전에 임하게 된다. 가와마스는 88년 서울올림픽 대표로도 선발된 아마추어 엘리트로 물론 일본인이다. 이동춘에게는 없는 ‘상품 가치’가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 인지 경기 내용에서는 분명히 이동춘의 승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와마스의 판정승으로 끝났다. 이동춘의 패배에 분노한 팬들은 링을 향해 쓰레기를 던지는 등 경기장엔 소란이 일었다.



일본 팬들이 준 새로운 기회…그의 생의 마지막 경기가 되다

일본 복싱 팬들은 타국 땅에서 7번이나 타이틀을 방어해 온 챔피언에 대한 경의를 잊지 않았다. 경기가 끝난 다음날 이동춘의 일본인 친구가 재경기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서명은 몇일 만에 1600명을 넘겼다. 일본 프로 복싱을 총괄하는 일본복싱커미션도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게 됐다. 그렇게 그해 9월 이동춘과 가와마스는 다시 한 번 일본 챔피언 자리를 두고 대결하게 됐다.

생애 마지막 경기에 나서는 이동춘

일본 팬들의 응원에 힘입어 챔피언을 되찾아 오려했던 이동춘. 하지만 운명은 너무나도 잔혹했다. 가와마스와의 재대결에서도 역시 판정패를 당한 것이다.

이동춘은 경기 직후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고, 4일 후 결국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일본 국내 타이틀 매치에서 발생한 첫번 째 사망사고로 기록됐다.

1995년 12월 도쿄돔이 있는 스이도바시 고라쿠엔홀에서 그를 추도하는 행사가 열렸다. 그곳은 그가 마지막으로 싸운 경기장이었다. 마스야마와의 첫번 째 대결 후 결혼을 약속했던 일본인 여자친구도 링 위에 올라 조용히 묵념을 올렸다.

일본 복싱 팬들 사이에서는 그레이트 가네야마, 이동춘은 여전히 잊을 수 없는 존재다. 외국인 복서으로서 겪은 불우한 경험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세계를 향한 끊임없는 그의 노력은 많은 사람들에게 가슴 울리는 감동을 선사해 준것 만은 분명하다.

지금 한국에서 이동춘을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이동춘과 같은 존재가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존재하는 많은 벽을 무너뜨리고 사람들 사이의 교류를 가능하게 해 줬다. 그런 이동춘의 존재를 필자는 언제까지나 기억해 갈 것이다.

<2021/6/27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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